카테고리 없음 2017. 11. 28. 17:43

몸과 사물의 연극 - 필립 장티론

몸과 사물의 연극 - 필립 장티론

안치운

 

 

세계는 꿈으로 되고, 꿈은 세계로 된다. - 노발리스

 

 

 

 

 1. 사물이라는 연극 언어에 대해서

 

 죽어 있는 사물은 응축되고 억압되어 있다. 사물에 생명을 입히는 연극 언어들은 가만히 있는, 죽어 있는 물체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위하여, 그것들을 더 멀리 나아가도록 강요하는 데서 생겨난다. 물체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나아가고 이리저리 날아간다. 물체의 떨림과 다른 공간으로의 움직임으로 해서 사물은 생명을 얻는다. 이와 같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에 의해서 단순한 오브제는 연극 언어로 변모되고 사물로서의 생명이 새롭게 연장된다. 무기력한 물체가 생기를 얻는 순간, 애니미즘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오브제에 의한 새로운 언어들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사라진다.


 필립 장티 연극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배우와 죽어 있는 사물의 언어 사이에 놓여 있다. 그의 연극에는 한마디의 말도 없다. 말도 없이 그의 연극은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말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 표류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연극에는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연극 속에 있는 언어는 새로운 언어이며 다른 언어이다. 그의 연극을 이루는 다른 언어는 말없이 말처럼 출렁거리며 표류하면서 가장 연극적인 언어를 회복한다. 그의 연극의 다른 언어는 말을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달리 여러 가지로 만들어 변형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배우와 죽어 있는 사물이 서로 구분되지 않기도 하고,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여러 개로 분열되기도 한다.


 필립 장티의 연극 속에 나오는 인물은 물처럼 수많은 욕망의 분신들이다. 그 인물들은 추상적이지도 풍자적이지도 않은 인형들로 분열되어 떠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없지만 그들의 욕망은 부서진 채 있다.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자신이 지닌 고통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인간들이다. 필립 장티는 이를 투쟁의 분열, 인물의 분열, 감소, 붕괴라고 말한다. 싸움과 싸우는 나와 상대가 복잡해지고 나중에는 이 모든 것들마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표류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차용한 릭이라는 역을 한 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이미지이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주인공인 릭은 표류하지 않고 표류를 방조하는 멈추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떠나는 대신 다른 여러 명의 국외 탈출자에게 가짜 여권을 만들어주면서 - 그것도 자신의 왕국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 절실하게 떠나야만 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인물로 존재한다. 표류를 보는 관객들은 이제 떠나지 않았던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도 떠나는 자신이 어떤 정체성을 지녔는지도 모르는 듯, 자신 스스로도 아직 무언지 모르는 듯한 여행의 목적을 찾기 위하여 그가 아니라 그의 분신들인 그들이 떠난다.


 그가 아닌 그들인 등장인물들은 말없이 침묵하는 세계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은 귀에다 밀랍 같은 것을 넣어 막아 원치 않는 것을 듣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귀머러기락 HEL고 실명하게 되는 세계가 그 침묵의 세계이다. 필립 장티의 연극 세계는, 브뤼노 베텔하임(B. Bettelheim)의 유명한 저서인 텅 빈 요새 La Forteresse vide가 설명하는 어린아이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면 타인들과는 서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표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어 이전의 세계, 논리 이전의 세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는 판단도, 의식의 여러 상호 관계도 없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작품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시작도 끝도 엇는 거대한 원으로 증명된다. 여기서 주인공의 이미지는 순백의 옷을 입어 검은 뒷배경과 대조를 이루면서 유난히 드러나 보인다. ‘가 자신의 결핍인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어머니의 태반 같은 투명하고 금세 찢어질 듯한 얇은 막이 존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미지는 얇고 투명하지만 거대한 장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 타의가 아닌 자신의 분신에 의해서 자신의 여행용 가방 속에 구겨 넣어진다.


 범주에 갇히면 모든 것은 고정된다. 연극에서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표현에 뒤따르는 하나의 의미는 관객들을 단편적인 사고 속에 가두어둔다. 그러나 필립 장티의 연극은 말이 없는 다른 언어를 통하여 한곳에 머물지 않고 관객의 상상력 안에서 표류한다. 표류하는 그의 연극 언어는 아주 넓고 넓게 멀리멀리 퍼질 대로 퍼져나간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먼 우주로, 자기 자신 속으로, 미처 알지 못했던 곳을 여행하는 것처럼, 그 여행의 결과인 기억에 남은 뚜렷한 흔적은 사물에 힘입어, 사물의 언어로 다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사물의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 이미지와 같아 단 하나의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언어의 소통이 가능한 영토를 만들어가고, 그 영토를 넓힌다.


 필립 장티 연극의 언어는 통상적인 연극 언어의 영역을 벗어난다. 즉 고정적인 영토의 바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형이, 마임이, 춤이, 음악, 오브제를 통한 무대의 여러 기술들이 이러한 연극 언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언어들은 가볍게 그리고 낯설게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이와 같은 그의 다른 언어의 연극이 창조되는 곳을 탈영토의 영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점이 그의 연극을 거리연극, 문학적 연극, , 인형극 혹은 마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단 하나의 언어만을 고수하고, 이를 강요하는 체제 유지적인 한국 연극의 무겁고, 경직된 언어와 좋은 대조를 이룰 것이다.


 끊임없이 고정되지 않은 연극의 탈영토화를 꿈꾸는 그의 시도는 그가 떠돌면서 순간순간 새로운 언어의 길을 트는 모험과도 같다. 필립 장티에게 있어서 새로운 언어는 무엇보다도 오브제로부터 나온다. 사물의 언어는 사물이 지닌 생명감에 의해서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언어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미 고정된 언어가 아니라 새롭게 창출된 언어로 관객들은 가장 은밀한 꿈이 묻혀 있는 영토 이른바 탈영토로의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관객들은 순수와 논리 이전의 원시림 속에 버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관객들에게 필립 장티의 연극이 신선하게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오브제에 의한 다른연극의 언어가 주는 황홀하고도 현기증 나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무대에서 배우와 오브제들이 서로 섞여 보여지는 요소들에 힘입은 것으로서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의미, 오브제와 빛에 대한 추구, 형식과 움직임과의 관계, 이미지와 현실과의 거리와 같은 연극적 매력들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들은 관객들을 서술적 논리에서 벗어나 꿈의 논리로 이끈다. 꿈의 논리가 펼쳐지는 장소는 무의식의 공간이며 상상의 공간이다. 한마디로 그의 연극은 연극적인 것과 조형적인 것이 탈영토의 공간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모든 이성주의를 파괴하는 마술의 세계와 같이.

 

 

 2. 밖에서 안으로 길을 내는 표류에 대해서

 

 「표류 Derives란 제목의 연극, 이 얼마나 매력적인 제목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의 기원은 머물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 떠돌이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코메디아 델라르테, 남사당이 다 그런 경우에 속한다. 고정된 제도를 부수면서 새로운 제도를 꿈꾸는 일이야말로 연극의 역사성이다. 연극을 전복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일회성과 나약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허락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연극에는 이런 정신과 실천을 찾아볼 수 없다. 연극은 고정된 정체성을 부정하는 예술, 그것을 허락받은 예술이란 점을 표류란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표류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떠돌고 흐르는 현상을 뜻한다. 막히고 억눌린 역사는 떠도는 이들을 많이 낳는 법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따라가는 이들처럼, 말 타고 달리는 선구자처럼,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의 욕망도 분열되어 (욕망의 퍼레이드 Desirs parade처럼) 떠돌고 흐른다. 표류속에 등장하는 축소되고 분열되어 겹겹이, 켜켜로 날아다니는 인형들처럼, 종내에는 육체가 엇는 텅 빈 존재로 소리 없이 떠돌다 사라질 때까지, 부풀대로 부푼 여인의 몸을 탐욕스럽게 더듬는 금붕어처럼, 육체적 감각만이 극대화된 여인은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며 무너져가는 도시와 같이, 불타오르는 도시와 같이 우리와 같이 흐늘거린다.


 필립 장티의 연극은 배우와 오브제를 구분하지 않고, 어둠과 밝음을 가로질러 길을 내며 간다. 가되 멈추지 않고 마냥 흐른다. 그렇게 흘러 다른 곳이 아닌 내 속을 돌아다닌다. 겉을 빠져나와 안으로 돌고 돌아 그 안을 정처로 삼는 것이 표류이다. 그러므로 표류는 홀로 낯선 섬 안에서 떠도는 그것과 다르다. 표류는 내 안을 떠돌아다니며 자신을 스스로 낯설게 발견하는 여행이다. 그 길은 얼마나 매혹적이며 위험한 여행길인가!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는 욕망은!


 등장인물들 역시 그냥 흐른다. 인물들은 살아 있는 배우로, 오브제로 문자처럼 호흡이 모음과 자음의 구별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그림자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유령처럼 없어지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 표류이다. 표현이 사라져 음악이 되고(표류에서는 모든 것이 용해되고 해체될 때 남은 것이 음악이다), 표류하는 원소는 모두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 자리는 무혐의의 세계이고, 극단적인 세계이고, 동시에 모호한 세계로 누군가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무대 위에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난다. 관객들은 반복하는 떠돎의 현상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연극을 통한 관객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대 위의 배우와 연극보다는 관객인 자신과 세계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립 장티는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만의 길을 내고 초등하는 알피니스트와 같다. 그는 그 길에 이름을 지어 붙이며 뒷사람들이 따라 오르도록 이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아주 멀리 떠나가 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그는 다시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3. 다성적 오브제에 대해서

 

 연극에서 오브제 objet, object란 무대에 있음으로써 관객의 눈에 보이는 물체를 일컫고 의미론적으로 보면 배우에게는 그를 감싸고 그와 대치하고, 그를 세계와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를 뜻한다. 움직이지 않아 억압되어 있고, 단지 보여진다는 면에서 오브제는 중성적 표현이지만 배우에 의해, 배우의 오브제는 주관적인 표현으로 변모된다. 미술에서처럼 연극의 오브제가 지니는 의미는 오브제의 형태와 움직임, 재료에 의한 질감 그리고 쓰임새의 위상에 따라 정해진다. 이처럼 현대 연극에서 오브제는 살아 있는 본질적인 의미소로 작용한다. 마치 현대 미술에 있어서 추상적 오브제 그 자체가 주제로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립 장티 연극의 주된 언어는 사물인 오브제이다. 필립 장티에 의하면 오브제는 말을 하지 않는 무기력과 수많은 말들을 생성하는 생동감사이에 놓여 있다. 오브제는 말이 없다는 면에서 무기력한 것이지만 그것이 들려지고 만져지고 자리를 옮기는 순간,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멀리 갈수록 놀랄 만한 생동감을 촉발한다. 사물의 언어는 더 멀리 갈수록 더 많은 의미를 낳는다. 사물의 언어가 지니는 의미는 생명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의 의미에 더 가깝다. 연극에서 사물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생명의 그것과 겨루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배우처럼 등장하는 오브제는 배우의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부재를 통하여 황홀경에 빠진 육체를 나타낸다. 오브제를 통하여 살아 있는 정신이 발산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띠고 있는 아름다움은 크레이그 E.G.Craig가 초인형 super-marionette에 대하여 정의내린 '죽음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이유로 배우의 몸의 언어가 끝나는 자리에 사물의 언어가 뒤를 잇는다. 몸의 언어가 생명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사물의 언어는 그것을 초월해서 죽음의 아름다움으로 향한다.


 「표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오브제는 인형이다. 사람의 탈을 한, 의인의 배우인 인형이다. 연기자와 인형을 연결시켜놓은 이유는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연기의 완벽함에 이르는 어려움과 동작으로 펼쳐 보이는 난점을들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기자는 인형이라는 하나의 메타포에 의지하게 된다.


 서구 연극사에서도 일찍이 위대한 연기자는 디드로 D.Didrot 이후 인형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연기자의 신체만으로는 예술 작품에 이를 수 없고, 연기자의 신체를 단지 배우가 지껄이는 일련의 고백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인형화 marionnetisation를 주장하는 이론은 크레이그에 와서 더욱 발전하였다. 연기자의 모든 감정과 몸을 인형으로 조종하고 대체할 수 있어야 하고 무대를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배우의 인형화이다.


 이는 당시의 사실주의 무대를 조야하고 난삽한 것으로 판단하고 예술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알프레드 자리 A.Jarry의 연극과 메이어홀드 V.Meyerhold의 연극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이론적 바탕을 달리한 형태로는 칸토르 T.Kantor의 죽음의 연극과 199110월 우리나라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피터 슈만 P.Shumann의 빵과 인형의 연극을 예로 들 수 있다.


 필립 장티의 연극에 등장하는 인형의 이상적인 경험은 소리와 동작을 지닌 인형을 조종하는 매력이다. 즉 같은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인형은 극적 공연성을 지닌다. 이것은 배우의 신체와는 다른 코드, 극에서 나타나는 연기자로서의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힘이며 인형의 신체와 감정뿐만 아니라 공연으로서의 체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객의 수용 문제가 덧붙여진다. 필립 장티의 연극의 특징은 연극 공연의 인형화, 연기자의 기호화, 공연에 있어서 살아 있는 현실의 기계화 등이다.


 필립 장티의 연극은 인형을 등장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인형을 다루는 위험성, 극의 생산자인 배우와 소비자인 관객이 지니는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른 관계, 살아 있는 연기자와 죽어 있는 인형인 연기자로서의 차이점 등이다. 필립 장티의 연극의 무대는 조각이나 2차원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설치 미술 등으로 공간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3차원의 공간과 4차원의 시간성을 극복하게 된다. 이때 소리와 빛의 환경적 요소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공간화, 빛의 이용, 소리의 이용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이미지의 세계를 확대하려고 시도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 조형 예술이 점차로 연출되어져 연극화되면(이와 같은 예는 칸토르의 연극에서 바퀴 달린 그림들을 연상할 수 있다) 점차 연극은 조형적이고 회화적인 관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필립 장티의 연극에 등장하는 인형은 단순히 대상()이 아니다. 그의 인형들은 움직임이라는 의미로 존재한다. 의인인 인형 하나하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인형은 잠재된 욕망을 펼쳐 보여준다. 인형은 그의 놀이와 여러 차원의 환경과 기능을 통하여, 기호들의 축적에 의하여, 이야기의 압축에 의하여 무대 공간을 탄력적으로 이용하고 새로운 언어를 제공하게 된다.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건네기 위하여 무대에 있다는 것은 연극의 고전적 화법이다. 배우가 말을 하고 이제는 오브제가 그 곁에서, 아니 배우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말없이 말을 하는 배우 노릇을 한다. 오브제는 이때 앞서 표현한 대로 사람 아닌 의인의 배우가 된다. 배우 아닌 배우인 것이다. 맡은 인물의 가면을 쓴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탈을 쓴 배우이다. 현대 연극은 배우가 오브제가 되고 오브제가 배우처럼 말을 하는 이른바 연극적 표현이 확장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즉 중성적 표현 기제가 주관적 표현 기제로 변하고 있다.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현실을 모방하는 언어와 달리 현실과 다른 상징을 지닌 오브제는 의미의 생성과 해석에서 제한적이지 않고 다성적 polyphonique이다. 오브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브제는 의미를 응축해놓은 그 무엇으로 배우 마음대로 관객 마음대로의 연극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연극에서 배우는 오브제의 너머가 아니라 오브제 안에서 자신을 변형하고 그 너머를 꿈꾼다. 자신마저 오브제의 하나가 되어, 사물 쪽으로 가면서, 그때 오브제인 사물들은 배우보다 더 멀리 출렁거리며 나아간다. 관객들과 함께.

 

 

 

 4. 오브제와 연출가의 저항에 대해서

 

 필립 장티의 표류가 바깥에서 온 죽음의 연극이라면 심재찬의 동맥은 안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심재찬은 죽음은커녕 삶의 저 밑바닥까지 향수를 지니고 있는 심성 고운 연출가이다. 그런 그가 오브제를 통해서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말해야 한다면 그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는 맨 처음부터 오브제에 대하여 저항을 보였다. 오브제에 대한 낯선 호기심은 그를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게 하지는 못했다. 필립 장티와 심재찬의 차이를 확인해보자.


 「동맥을 연출하기로 한 심재찬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글을 써줄 것을 청탁했다. 관객들이 이런 연극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연극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이와 같은 연극에 관심을 지닌 이도 많지 않다고 하면서 힘든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연극을 해보는 것이 자신에게 처음이라고, 그 어려움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글을 쓰는 평론가 앞에서 연출가가 지녀야 할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는 애써 관객들과 연극 공부하는 이들을 빗대어서 자신의 불안을 전해왔다. 필자가 연극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연출가로부터 이런 요구를 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한참이 지난 후 연출가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무대에서는 배우뿐만 아니라 오브제가 말을 해요. 배우가 오브제로 이야기를, 이야기가 배우의 오브제가 되기도 하면서, 문제는 이 두 개의 화법을 조화시키는 데 달렸어요. 안 해본 일인데…… 그의 고백을 이제서야 듣는다. 안 해본 일, 그러니까 그것을 필자더러 먼저 해보란 뜻이었다. 공연이 아니더라도 글로나마 자신이 경험하게 될 죽음을 먼저 맛보란 뜻이었으리라. 연출가 심재찬은 그때 처음으로 필자에게 이런 공연을 물체극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주었다. 오브제를 가지고 하는 물체극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


 왜 예술가는 안 해본 일에 지레 겁을 먹는가? 비 오던 날 필자는 예일 연습장까지 가서 보았다. 그곳은 맛 대신 겁이 나는 곳이었다. 배우들이 칼을 뽑고 대드는데 연출가가 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습장 바닥에는 온통 진흙이 깔려 있었고, 진흙을 파면 그 밑의 흰 가루가 드러나 보였다. 배우는 누워 있는 다른 배우의 몸을 한지로 감싼다. 걷어낸 종이는 그 안에 배우의 볼륨을 담은 채 진흙 위에 누워 있다. 배우는 돌아다니며 진흙을 뜯어내어 작은 인체들을 만들어 그 진흙 위에 세운다. 구멍이 난 얼굴들,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 있다. 진흙과 종이, 흰 가루들은 얼마든지 형체를 달리할 수 있는 재료들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지닌 마성은 무엇인가? 왜 배우는 이러한 사물에 집착하는가? 원래대로 있고 싶지 않고 새롭게 변화되고 싶다는 바람, 어릴 적 그것들과 함께 논 즐거운 추억을 되살리기, 고정된 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증, 말하는 것을 보여지는 것으로 만들기 등등의 느낌들을 나는 연습을 지켜보며 받았다.


 연출가가 지닌 겁은 지금까지 자신의 연출 작업이 고정적이었고 제한적이었다는 각성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리라. 열린 다양성 앞에 갈 곳 몰라 머뭇거리면서 그는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자와 같았다. 필자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습 과정보다 훨씬 신기해 보였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청탁을 받아들였다. 연출가의 겁을 같이 먹어볼 심사로 나는 다시 물었다. 내게 청탁을 하는 것이냐고, 그렇다고 그가 말했다. 연출가와 함께, 아니 그보다 조금 먼저 죽음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필자는 관객들이 놀라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의 글이 아니라, 관객을 이해시켜 작품이 놀라지 않도록 글을 쓰고 싶어졌다. 작품의 이해가 아니라 관객의 이해, 작품을 진정시켜 겁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겁먹은 연출가의 초상을 앞에 두고 더 겁먹을 관객의 불안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그리하여 관객들이 늘어난 불안의 양만큼 더 많이, 더 빨리 작품에 다가설 수 있도록 겁 없이 사물의 연극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 질문부터 하자. 오브제란 사회학적으로 사물(事物)이고, 연극적으로는 물체(物體)인가? 물체의 연극이라고 하지 말고 사물의 연극이라고 하자. 물체가 물리적 단계의 지칭이라면 사물은 물리적 단계를 너머 물리적인 것이 기호로, 의미로 조작되고 작용하는 범주로까지 확대된다. 사물의 연극은 분명 연극 표현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물체보다는 사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물이 지배하는 세계의 연극, 추상적인 사물이 이 세계의 근본적인 리얼리티임을 강조하는 연극, 무대라는 환경을 뿌리째 전환시켜놓을 만큼의 지배력을 지닌 사물의 연극은 사물의 추상성, 사물의 기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물의 체계 Le systeme des objets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첫 번째 책이 있다. 사물이 더 이상 물리적 물체로 존재하지 않고 -무엇으로 쓰인다는 것이 아니라 - 기호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아니 기호로서 조작된다는 입장을 강조한 이 책은 사물의 체계로 사회를 읽는 현대 사회학의 고전과 같다. 사물을 기호로 보고, 기호를 파악하는 것은 현대 사회학에서나 현대 연극에서나 공통적인 일이다. 지금 관객 앞에 사물의 연극이 마련되어 있다. 이런 새로운 유형의 연극은 - 연출가를 겁먹게 하면서까지 - 고전적인 연극의 경계를 훨씬 벗어나 관객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 마음대로, 그러나 사물의 연극은 관객에게 없는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상상력을 끌어내려 한다. 다시 말해 유혹한다. 무대에 등장하는 사물을 매개로.


 사물의 연극에서 사물은 더 이상 소품을 뜻하지 않으며 그런 규정을 만들어내는 가치와 범주를 아예 없애버린다. 오브제가 소품(小品)이 아니라 대품(大品)이 되는 연극이 사물의 연극이다. 사물이 연극의 주체인 대품이 되면 당연히 배우는 객체인 소품이 된다. 사물의 연극은 가능한 한 주체인 배우를 객체인 오브제 쪽으로 아예 자리를 바꿔놓는다. 사물 쪽으로. 연극에서 주체와 객체의 방향 전환은 배우에게 공감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관객들을 실망시키고 불안하게 한다. 엄밀하게 분석하면 관객보다는 배우가 먼저 실망한다. 배우가 사물에 기술 제휴를 한다. 무대에서 함께 놀자고. 위상이 격하된 배우가 격상된 오브제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아니 변화된 기술 사회의 과정에 합류한다. 사물이 기술 사회의 적자라면 배우는 사물의 경쟁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사물의 연극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적 연극인 이유다.


 왜 사람 아닌 배우인 오브제가 배우의 탈을 쓰고 현대 연극에 등장하는가? 배우가 모자라서, 그것도 사람처럼 말을 하고, 배우처럼 말을 하게 하는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연극에서 오브제는 일종의 무대 장식이다. 무대 환경을 결정하는 오브제는 늘상 사회적 쓰임새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연극에 이르면 오브제는 미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더 많이 지닌다. 있는 그대로의 오브제가 아니라 스스로 부서지고, 자기 모양을 달리 변화시키고, 다른 것과 더해지고, 분열되듯 찢어지고, 바닥에서 공중으로 매달려지고, 그것처럼 있다가 저것처럼 없어지고 마는 것들이다. 하나의 오브제가 하나의 의미로 있지 않고 공연할 때마다, 관객의 수용에 따라 상징으로, 놀이로 변화한다. 그것은 이렇게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 세계는 사물의 세계이다. 그가 쓰는 사물과 연극에서 쓰는 물체란 다 같이 오브제의 번역어이다.


 사물 그러니까 오브제의 기호와 사용에 의해서 모든 의미 체계가 결정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배우는 결국 완전한 패배를 경험해야 하고, 인간은, 배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의 전면적인 지배를 받는다. 소외당하고 지배받으면서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아닌 사물로 향한다. 뒤돌아보면 연극의 주체로서 있었던 행복했던 시절, 지금은 없어진 그러나 갈 곳은 이미 정해진 발걸음으로 사물을 향해, 사물로 가 사물의 하나가 된다. 이 물화된 세계가 연극으로 바뀌면 사물의 연극, 배우조차 물성을 지닌 존재로 바뀌고 마는 소외의 연극이 된다. 배우가 오브제로 변하면 배우는 한없이 낮은 존재로 낮아지는 슬픔을 맛보아야 한다. 배우는 내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의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찾아서 나 아닌 다른 것을 사물 쪽에서 찾는다. 오브제의 연극, 사물의 연극은 배우를 둘러싼, 배우와 연극을 감싸는 사물의 체계, 사물의 사회로 배우와 연극이 할 수 없이 한 몸이 되는 연극이다. 알면서 모르게 - 변화를 인정하면서 또한 그 변화를 부정하면서 - 그것으로 다가가는 양가적(兩價的) 연극, 오브제, 즉 사물에 지배받으며 그것에 다가가면서 새로운 것 - 기호들 - 에 열광하고 그것들을 꿈꾸는 연극이다.


 오브제가 배우로서 (이 연극을 만든 이들은 행위자라고 부른다) 연기를 한다. 연기가 배우의 구체적 드러냄이라고 한다면 배우의 오브제는 그 드러냄(보이지 않는 정신)을 주관적 이미지(보이는 사물)로 환치한다. 오브제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의미의 우회는 이럴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오브제의 연극, 연극적 오브제의 의미를 강조하는 작품에서는 오브제가 연기를 한다. 고정된 형체가 없이 배우 대신 오브제가 그 배우 노릇을 다한다. 배우와 오브제가 동등하게 등장한다. 서로 마주보고, 서로 엿보고, 서로 등 돌리고, 서로 팔로 감싸고 껴안아 한 몸이 된다. 관객이 연극을 보기 전에 손에 쥔 프로그램 안에도 오브제는 등장인물 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답답해지는 것은 관객이다. 관객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 오브제와 함께 놀라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해서 결국은? 누구 좋으라고. 놀아도 그냥 놀지 말고 상징적으로 놀기, 무대를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소품의 배우들과 대품의 오브제와 함께 공범으로 있으면서 관객이 노는 것이 가능한가? 이렇듯 사물의 연극은 관객에게는 모호한 연극이다. 현실(혹은 그것에 대한 지시)이 없으면서 현실의 기호만이 난무하고 그것만을 꿈꾸는 연극이다. 진흙 속에서 흰 가루를 끄집어내어 여러 갈래 길을 내듯이. 여러 갈래의 흰 길들, 곧 없어질 길들처럼.


 사물의 연극이 사물화되는 사회의 내부에 있는 연극이라면, 그 속에 빠져 있는 연극이라면 관객은 더욱더 그 내부에 있다. 사물의 연극은 사물의 체계를 q서어나지 않은 연극이라는 면에서 그 어떤 연극보다도 이런 현실과 결탁하고, 관객 역시 이에 동의해야 하는 연극이다. 사물의 체계를 벗어난 연극이 아니라 그 무력감에 쏙 빠진 연극, 그래서 배우의 고백은 무슨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모르는 무력함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그 고백 속에 듣는 이의 존재는 불확정적이다. 누구여도 괜찮고 누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고 그런 상대를 위한 고백들.

동맥이란 작품의 텍스트는 폐쇄 회로에 갇힌 이의 고백과 같다. 고백은 자기 자신의 내적 상태를 지시하지 않고 의미하는데 소멸과 소외의 관념적이고 동시에 너무 은밀한 상징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마치 자의적인 말이야말로 그 어느 것하고도 맞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 그것을 과잉으로 낭비하는 말들, 그래서 거짓 같은 헛 몸부림을 관객은 본다. 아파하는 말들 곁에 사물들은 그 얼마나 의연히 자신들을 부수고 희생하는가? 소리도 내지르지 않고. 말들이 아파서 격렬하게 신음하고 떨 때 무대 중앙에 놓여 있는 진흙밭, 흰 가루, 종이와 같은 사물들은 배우의 말보다, 그 고통보다, 그 떠난 말들의 죽음보다 더 빨리, 말없이 망가지고 무화된다. 배우의 말과 고통이 밖으로 향할 때 사물은 안으로 안으로 죽음을 가속화한다. 이렇듯 사물의 연극 그 끝은 파국이다. 사물과 배우가 환멸을, 죽음을 직시하는 상상적 파국이다. 찾을 길 없는 현실의 기호로 남길 뿐.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보면 어지럽고, 기분 나쁘고,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깊이가 없는 연극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그러니까. 관객의 상상력이 유혹받지 않으면, 사물같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박탈당한 관객이 물상화를 극복 못 하면 보던 도중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객들은 없을 것이다. 공범이므로. 너와 내가, 배우와 오브제가, 연극이 현실과 관객이 현실과 타협하고 결탁했으므로. 공범끼리 만났을 때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는가? 서로의 부정적 탐색과 약속된 헤어짐 이외에는. 이제야 알겠다. 왜 연출가가 지레 겁을 먹었는지를. 겁은 공범들과 함께 자신이 공범 되기의 머뭇거림이며, 공범 키우면서 내세우는 알리바이와 같다. 그렇다면 그도 여기에 연출가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비정상적인 것 앞에 정상적으로, 추상적인 의미 앞에 의미의 지시로 말이다. 연출가여, 관객들이여, 당신들도 이 작품의 공범이다. 이 글 역시 작품의 공범이다. 작품 역시 당신들과 이 글의 공범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보자. 눈을 감든지, 귀를 막든지 마음대로.

 

천 개의 이미지 2017. 6. 5. 13:00

Philippe Genty and other puppet theatre

필립 장티 및 기타 인형극 자료




필립 장티

 

https://youtu.be/bwUVEh6U_AE - 필립 장티 워크숍

 

https://youtu.be/p7XZcSZxNLw

Oficina Philippe Genty - experimento - Platô

 

https://youtu.be/2thbrDgU-a8

https://youtu.be/Y4PPEWDqRIQ

https://youtu.be/6h_Zc8908Mw

https://youtu.be/4TLtMvAQcno

Oficina com a Cia. Philippe Genty - Exercício de Cenas II

 

https://youtu.be/z4Iwo-oYdAg

Philippe Genty - Voyageurs Immobiles 2010 - Full LIVE HD

 

https://youtu.be/LqUc5Skf-ho

Philippe Genty - Lands End - Full LIVE

 

https://youtu.be/IRPW5VKgGJc

https://youtu.be/t6Vi8Glgj9I

Philipe Genty - Zigmund Follies

 

https://youtu.be/8MTCOGWDtPE

Philippe Genty - Ne m'oublie pas (Forget me not) 티져

 

https://youtu.be/vcuxJ8UgjoQ

https://youtu.be/awPsdhUQetk

https://youtu.be/3zADW3piZ_o

Philippe Genty & HINT Theatre School

- Forget Me Not (Ne M'Oublie Pas) - Official

 

https://youtu.be/15O-U3j3qVE

Scenes from the performance Escaping Memories (Szökő Emlékek)

 

https://youtu.be/sbcYSh8TK88

Philippe Genty – Figurentheater

 

https://youtu.be/z-I19IUf-0o

Philippe Genty - Puppet Theater

 

https://www.youtube.com/watch?v=plvhhyp_61Q

Sortir : Philippe Genty à Avignon

 

https://youtu.be/XxGW_kG6js4

BOLILOC Compagnie Philippe Genty

 

https://youtu.be/yZInkOMjdks

Genty Heads

 

https://youtu.be/DQOVHItBfmA

Philippe Genty's MAN

 

https://youtu.be/I7Vthu79NyM

Philippe Genty - L'Attrape Rêves - Full FILM

 

https://vimeo.com/104001714

Philippe Genty : Dustpan Odyssey teaser

 

 

 

 

 

 

슬라바 폴루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1&contents_id=88455

스노우 쇼 개괄

 

https://vimeo.com/45065783

스노우 쇼 티져

 

https://youtu.be/GdDA4V2GQyE

슬라바 폴루닌 - 스노우 쇼 FULL

 

https://youtu.be/64CfabFxGiA

폴루닌의 광대예술 예시

 

https://youtu.be/fbgprUDoUx8

Jerome Murat-La Statue

 

 

 

 

 

빅토리아 채플린 + 쟝 밥티스트 극단


Le Cirque invisible de Victoria Chaplin et Jean-Baptiste Thierrée 

https://youtu.be/n2WrmzjO0R8


Aurelia Thierree. 

https://youtu.be/ZQ5S0TdvhzU


빅토리아 채플린 - 속삭이는 벽 리뷰 

http://hersight.blog.me/20169221372

 

 

 

 

 

 

 

 

 

 

그림자극


PILOBOLUS : LES OMBRES - LE PLUS GRAND CABARET DU MONDE 

https://youtu.be/JD4bTOHRrH8


Shadowland Flower 

https://youtu.be/Z0EO8rhCHhw

 

Shadow Acts on Britains got Talent Semi Final 2013

https://youtu.be/g4s0pcePFZ0

 

Attraction Black light theatre Shadow Concept

https://youtu.be/SosyNi8JuAg


Interactive Wushu Shadow Fight Performance - 영상을 활용한 퍼포밍 아트 예시 

https://youtu.be/RACQeGaHXDI

 

 

 

 

기타


je boîte - marzia gambardella 

https://vimeo.com/152017810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나오는 인형조종 

https://youtu.be/TEVlDb43v-4



이카루스 ICARUS – The Fall (오브제 활용이 돋보이는) : 이미지공작소 생생 블로그 

http://blog.naver.com/iago1004/50101077404

 


공연창작집단 뛰다 - 상자 속 한 여름 밤의 꿈 : 이미지공작소 생생 블로그

http://blog.naver.com/iago1004/50096794340

 


Twin Houses (인형과 하나되어 둘을 연기하듯) : 이미지공작소 생생 블로그

http://blog.naver.com/iago1004/50096472276

 


festival international des arts de la marionnette

이미지 – 영감 얻기 : 이미지공작소 생생 블로그

http://blog.naver.com/iago1004/50094962446


 

festival international des arts de la marionnette à Saguenay 2012 티저

https://youtu.be/YQxLWxAVpHg






컬쳐허브 멀티미디어 인형극 '장화 홍련 &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레퍼런스


허씨와 두 아들들 (세 캐릭터에 연민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 레퍼런스)

https://youtu.be/uJRwRsvTn0w

 


허씨와 배좌수

https://youtu.be/XxGW_kG6js4?t=7m47s



장화, 홍련이 죽음의 세계에서 인형으로 化하는 장면  

https://youtu.be/TklU7b83l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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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이미지 2017. 6. 5. 12:05

Puppet theatre



National Puppetry Conference Performance  -  베개 오브제 + 마임

https://youtu.be/476pxXCnzO0



World of Paper Puppetry Demonstration - Gary Friedman Productions

https://youtu.be/t8q2u3VR7bQ



A World of Paper (Corporate Promo)

https://youtu.be/AzqnDIZhz_I



A World of Paper (Schools Film)

https://youtu.be/7BAdzpbq_iU



A World of Paper (Corporate Film)

https://youtu.be/gUnAA0GU9A8



Object Theatre - Puppet play Prestopi - Under Water

https://youtu.be/9OsmMEunKJs



Ducky (Czech/Curtain of Light Puppetry)

https://youtu.be/93NyjMLUF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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